
자문 협조 감사드립니다.
@uxcxnditionally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은수 언니의 고등학교 후배. 같은 동아리로 활동하며 일명 영은수 껌딱지로 전교에 유명했던 인물이 바로 저, 하이슬이거든요. 졸업한 뒤에도 당연히 계속 연락을 이어나갔죠. 언니가 워낙 잘난 데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제가 또 치대기 전문이라 그런가. 안부가 끊길 일은 다행히 없었네요. 그렇다고 제가 마냥 한가한 사람인 건 아니에요. 은수 언니가 관악 그 대학 나와서, 사법고시 합격하고 검사 임용될 동안 저도 저 나름의 일에 열중하느라 바빴으니까요. 그게 뭐냐면, 바로…… 글 써서 책 내기.
로코, 새드, SF, 심지어 에세이까지 정말 다 써봤는데. 베스트 셀러 한 번 해보고 싶다는 그 꿈은 왜 이리도 이루기 어려운 걸까요. 애매모호한 판매량으로부터 오는 좌절의 횟수를 셀 수조차 없어질 때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는지 드디어 제게도 기회가 왔습니다. 바로 작가 인생에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한다는 그 궁극의 영감. 아, 이건 된다. 이건 대박날 수 있다! 탄성이 절로 터지는 완벽한 스토리가 어느날 문득 떠오른 거 있죠. 벅차오르는 가슴을 안은 채 단숨에 스토리보드까지 작성했고, 이젠 본격적으로 살을 붙여 집필에만 들어가면 되는데…… 문제가 하나 있지 뭐예요. 왜냐하면, 이번에 떠오른 이야기의 장르는 수사물이었으니까요. 기막힌 사건의 내용과 범죄 트릭은 딱 정해 뒀는데, 이걸 주인공들이 수사하고 범인을 찾아 나가게 하려면 먼저 작가가 제대로 알아야 할 요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독학에는 어쩔 수 없이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 결국 있는 인맥이라도 탈탈 털어 보자 싶은 마음에 SOS 신호를 보내게 되었죠. 누구에게? 바로 서부지검 형사 3부, 영은수 검사님에게.
여기까지는 나름대로 순조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건 지금부터인데요, 왜냐하면…… 제가 언니에게 정중한 거절의 의사를 전달받았기 때문. 언니. 나 진짜 인터뷰 받아 줄 사람이 좀 필요한데. 많이 어려운 거야? 응. 책에 쓸 내용이면, 나중에 내가 도와줬다고 이름도 올려야 할 텐데. 내가 아직 수습 딱지도 못 뗀 바람에 어디 도움 주기가 어려워. 미안해. 가뜩이나 막내라 정신없이 바쁘기도 하고. 아, 그럼 혹시 언니 대신 부탁해볼 만한 분은 없을까? 계속 번거롭게 해서 미안. 그런데 내가 진짜 이번 원고는 꼭 통과되고 싶거든. 거의 생사가 달린 문제거든. (ㅠㅠ) 그러면 내 지도 검사…… 아니다. 황 선배가 그런 걸 해줄 리가 없지. 언니. 누구든 괜찮으니까 나 딱 연결만 해 주라. 그다음은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여차저차 우당탕탕 빌고 빌어 만남 약속을 잡았는데, 나가 본 약속 장소에 내 취향 200% 소라빵 미남이 등장했을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하도 부탁해서 만든 자리인 만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밤까지 새워서 질문을 정리해 온 저였지만, 어쩐지 얼굴에 한눈이 팔린 바람에 준비해 온 질문의 삼분의 일도 다 묻지 못했다면요. 이런 프로답지 못한 태도, 정말이지 반성해야 할 만한 일이지만…… 아니.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생기래? 그러니까 이날 평생 유구한 얼빠로 살아온 이 사람(하이슬, 25세)은 취재 도중 사심을 가득 담아버릴 위기에 처했던 거죠. 남은 질문을 아끼고 아낀다 한들 앞으로 서너 번밖에 더 못 만날 것 같은데. 안 보면 벌써부터 상사병이라도 도질 것 같은 이 기분, 설마 사랑인가요?
인터뷰를 빙자한 사심 가득 약속을 잡는 걸로도 모자라, 뻔뻔하게 사심 섞인 연락까지 곧잘 할 예정입니다. 용기 있는 자가 미남을 잡는다는 말을 신조로 삼고, 도와주신다고 하셨으니 이 정도는 괜찮지요? 식의 명분을 세워 가며 은은하게 이런 수작 저런 수작 다 부려 볼 생각이에요. 머릿속을 열어보기라도 하면 찾았다 내 사랑, 내가 찾던 사랑. 못 먹어도 고. 밑져야 본전. 이런 말들만 가득 있을 테고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로는 어딘가 허술한 이미지만 드렸을 것 같기는 한데, 알고 보면 그렇게 빈틈이 많은 사람은 아니랍니다. 나름대로 제 책을 찾는 고정 소비자층도 (적긴 하지만) 있고, 글을 쓸 때는 누구보다 진지한 편이라서요. 작가만큼 사람의 감정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본 사람도 드물지 않을까요. 언젠가 저희가 담뿍 가까워진 날에 제가 검사님의 결핍을 알게 된다면 말이에요. 안타까움에 아려 오는 마음과는 별개로 한편으로는 들뜰지도 모르겠어요. 역시 내가 딱이네, 하는 철없는 생각이 들어서. 검사님이 잃어버린 것들을 곁에서 하나하나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 그건 아마 저일 것 같거든요. 보통 사람들도 생각보다 본인 감정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는 거, 검사님은 아세요? 저는 달라요. 내가 가진 이 기분이, 기쁨이, 행복이, 슬픔이 무엇인가에 관해 깊게 고민해 본 밤들이 있거든요. 그리고 그 밤들을, 이젠 당신에게 아낌없이 전해 드릴게요.
그러면 이제 서사에 관한 부분은 전달 드린 것 같고,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할까요. 우리가 정말로 만나서 함께하게 될 경우에 쓸모가 있을 이야기들이요. 예를 들면 생활 패턴이라든가.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적당히 일어나 적당히 잠드는 생활 중입니다. 픽픽 쓰러지는 기절잠 비율이 높아서 그런지, 저는 하루 안에 모든 대화를 마무리 지을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역극을 이어가고 있던 경우에 특히 그래요. 한번 시작했던 극으로 일주일을 끌어도 괜찮아요. 다만, 검사님과 제 기력이 따라 줄 때의 일이지만…….
역극 이야기가 나왔으니 거기에 대한 제 생각을 좀 더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일단 가장 크게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검사님이 어떤 것에든 얽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역극 중이라고 해도 제 다른 트윗에 마음 남기실 수 있고, 퍼블릭 트윗을 적으셔도, 카톡을 보내셔도 괜찮아요. 그쪽은 그쪽이고, 다른 쪽은 다른 쪽으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거든요. 역극 길게 잇는 동안 혹시라도 제가 보고 싶으실까 봐 드리는 말 맞습니다. 불필요한 걱정이었다면 약간 무안해지고 마는 걸로. 나름대로 역극 경험은 적지 않으니 저만큼이나 검사님도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볼 생각입니다. 지문 작성 시 감정과 행동 묘사가 골고루 섞인 종결형 괄호체를 사용 중이고, 깊게 나누는 감정들을 정말이지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이라는 점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대화체 역극도 짱짱 좋아요. 오히려 좋을지도?
진지하게 구는 모습도 자주 보시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개그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도 알아주시면 좋겠네요. 제 안 웃긴 개그를 듣고 반응할 방도를 잃으실 검사님께 미리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 말줄임표가 나와서 말인데. 저는 말 중간에는 6, 끝에는 7 사용할 예정이에요. 검사님은 3/6, 4/7 중 어느 쪽을 사용하시든 괜찮습니다. 맞춤법은 원칙을 지향하는 편이며, 모든 대화 시엔 검사기를 애용합니다.
자랑은 여력이 닿는 대로 자주 하는 편입니다. 제가 검사님께 받은 것들 중 어떤 것이 특히 좋았는지, 이게 좋았던 이유는 뭔지. 검사님도 그런 정보들을 궁금해하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좋다는 감정은 그때그때 표현해야 하는 거라고 배우기도 했고…… 어쩌면 제가 이만큼이나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이 검사님께 일종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건방진 생각도 조금은 품고 있기 때문에 자랑은 자주 보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기념일은 굳이 챙기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지 오늘로 며칠. 그런 숫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래되었다고 꼭 깊은 관계인 것도 아니고, 짧다고 해서 얄팍하리라는 법도 없으니까요. 가끔 얼마나 됐나 들여다볼 일은 있겠지만 매일매일 날짜 넘어가는 걸 세는 편은 아닙니다. 그러니 시중에서 들려오는 기념일 정도나 가끔 챙겨 보기로 할까요. 여력이 되면 그렇게 하고, 아니면 마는 걸로. 사실 선물을 주고받는 건 뭐랄까, 꼭…… 사이버 관계의 일부가 현실로 넘어오는 기분이 들어서 크게 선호하지 않는 편입니다. 역극으로만 챙겨주셔도 괜찮아요. 크리스마스에 와인 한 병 선물해 주시는 검사님, 로맨틱하잖아요. 제 쪽에서 선물이 가는 일이 있다면 그건 검사님이 아니라 그 너머에 계신 분을 향한 마음일 겁니다. '추운데 차 한잔이라도 드세요……. 항상 감사합니다…….' 따위의 메시지가 그 선물 뒤로 깔렸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관심과 애정도 모두 수고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라, 그로부터 비롯된 감사 표시에 가까울 것 같네요.
떠오르는 대로 상세히 말씀드리다 보니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저에 대해 최대한 알려드리려 노력했으니 모쪼록 검사님의 판단에 도움이 되시기를 바라요. 저는 이만 잔잔한 프러포즈 멘트로 글을 끝맺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있잖아요. 검사님. 지금 쓰고 있는 원고가 마무리되면 다음 작품은 다시 로맨스가 어떨까 싶은데.
그땐 주인공으로 등장해보지 않으실래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따스한 연말 되세요.